아메리카에 정착한 청교도들의 감사 축제
미국의 가장 큰 명절인 ‘추수 감사절(Thanksgiving Day)’이 돌아왔다. 올해 추수감사절은 11월의 네 번째 목요일인 11월 24일이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추수감사절을 가족을 비롯해 가까운 친척, 친구들과 함께 지낸다. 올해는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지난 3년간 가족들과의 만남이 중단됐던 만큼 예전보다 더 많은 미국인이 가족과의 만남을 가질 것으로 예상한다. USA투데이가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0%가 추수감사절 연휴에 맞춰 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응답한 것을 봐도 그렇다. 이처럼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추수감사절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유래와 역사는 어떻게 되는지 미국 역사와 기록을 찾아 소개한다. 매년 바뀌는 추수감사절 추수감사절은 연방 국경일이다. 연방 정부가 11월 네 번째 목요일에 기념한다고 정했기 때문에 매년 공휴일의 날짜도 바뀐다. 따라서 올해는 11월 24일을 추수감사절로 기념하지만, 내년에는 11월 23일부터 추수감사절 연휴가 시작된다. 날짜를 따져보면 11월 네 번째 목요일에 추수감사절이 시작될 수 있는 가장 이른 날짜는 11월 22일이고, 가장 늦은 날짜는 11월 28일이다. 첫 국경일과 지금은 다르다 추수감사절을 연방 공휴일로 처음 선포한 이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다. 워싱턴 대통령은 1789년 11월 26일을 '국민 추수감사의 날(Day of PublickThanksgivin)'로 선포했다. 앞서 연방 의회는 1789년 9월 28일 추수감사절을 연방 공휴일로 지정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대통령에 따라 추수감사절을 기리는 달과 날짜는 매번 달라졌다. 1929년에 임기를 시작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추수 감사 공휴일을 목요일 대신 금요일로 바꿔 사흘 동안 추수감사절 연휴로 지내는 아이디어를 검토하기도 했다. 그러다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마지막 목요일을 지정하면서 날짜도 고정됐다. 아쉽게도 이 역시 마지막 해결책은 아니었다. 연방 의회 기록에 따르면 프랭크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인 1933년 11월 목요일이 5개가 되자 미국인의 절반은 네 번째 목요일에, 나머지 미국인들은 마지막 목요일에 추수감사절을 기렸다. 공휴일이 2개로 나눠진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9년 11월에도 또다시 목요일이 5개가 되자 공휴일의 시작을 세 번째 목요일로 옮겼다. 이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했는데, 소매업체들이 크리스마스 쇼핑 시간을 충분히 줘야 한다며 추수 감사절 연휴를 1주일 앞당겨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대공황을 겪던 미국의 경제 활성을 위해 공휴일까지 변경했지만 일부 주 정부는 자체적으로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기렸다. 오락가락하던 추수 감사 공휴일은 2년 만에 연방의회가 나서면서 정리됐다. 1941년 연방 의회는 네 번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기념한다는 결의문을 통과시키며 공휴일 날짜를 못 박았고, 이후부터는 변동 없이 이를 지키고 있다. 첫 추수감사절 가장 널리 알려진 초기 추수감사절은 1621년 윔파노아그 인디언들과 가을 추수 잔치를 함께 한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의 순례자들의 추수감사절이다. 1620년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 영국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매사추세츠와 버지니아에 정착한 청교도 순례자들은 1년 뒤 풍성한 농작물을 수확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아메리칸 인디언들과 함께 가을 추수 잔치를 열었다. 3일 동안 지속한 이 축제는 식민지에서 '첫' 추수감사절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미국 땅에서 진행된 다른 감사 의식들도 있다. 1565년 스페인 탐험가들과 플로리다의 성 오거스틴을 기리는 티무쿠아 사람들이 감사 의식을 가졌다는 기록이 있다. 1619년에는 영국 정착민들이 버지니아 제임스 강둑에 있는 버클리 헌드레드로 알려진 곳에 도착했을 때 감사의 날을 선포했다. 물론 수확을 위한 '감사절'에 대한 아이디어는 이집트, 그리스, 로마인들의 기록에도 나온다. 아메리칸 원주민 문화도 유럽인들이 그들의 땅에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수확기에 축제를 열고 감사를 표하는 풍부한 전통을 갖고 있다. 순례자들 이후에는 2세기가 넘도록 각각 식민지들과 주들에 의해 기념됐다. 순례자들의 미국 정착기 1527년 헨리 8세의 이혼(혼인 무효) 문제로 촉발된 교황과의 갈등은 1533년 잉글랜드가 종교개혁을 선포하면서 로마 가톨릭과 결별의 길을 걷게 된다.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헨리 8세를 파문하자 1534년 잉글랜드 의회는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잉글랜드 교회를 독립시킨 후 영국 성공회를 국교로 삼았다. 그러나 영국 성공회는 진정한 의미에 개신교가 아니었으며 헨리 8세가 신봉하는 믿음도 가톨릭 그 자체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종교분쟁을 피하기 위해 타협안을 만들었는데 의식은 가톨릭을 따르되 교리는 켈빈주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타협안에 반대하며 급진 개혁을 추구했던 청교도는 중도노선을 지향하는 성공회와 갈등하기 시작했다. 1603년 제임스 1세가 즉위한 후에도 종교적 박해가 이어지자 청교도들 일부는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그리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향한다. 이들의 원래 목적지는 허드슨 강 하구의 현재 뉴욕 시 인근으로 당시 영국의 버지니아 정착민이 살던 제임스타운이었다. 버지니아 정착민은 13전 전인 1607년 미국에 도착해 정착 중이었다. 하지만 경로를 이탈한 메이플라워호는 케이프코드 끝의 낚싯바늘 모양의 프로빈스 타운 항구에 닻을 내렸다. 11월 21일 선상의 질병에 시달리면서 66일간 항해한 끝에 미국에 도착했지만 결국 영국인 102명 중 절반 이상이 추위와 괴혈병으로 사망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이듬해 봄에 플리머스 해안으로 이동했고 이곳에 두 번째 영국인 정착지를 설립한다. 기록에 따르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사람들은 매사추세츠에 도착하기 전에 배 안에서 소위 메이플라워 서약을 체결했다. 질서와 안녕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하나의 시민 정치체를 만들고 필요한 법률과 공직을 제정하여 이에 복종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식민지 의회의 설치와 자치체의 형성은 그 뒤에 건설된 다른 식민지에도 도입되었다. 칠면조 요리를 먹는 이유 통계에 따르면 미국인의 90% 이상이 추수감사절에 칠면조 요리를 먹는다.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올드린은 달에서 그들의 첫 번째 식사로 호일로 포장된 구운 칠면조를 먹었다고 나온다. 노릿하게 구운 칠면조 고기와 소스, 스터핑으로 장식된 풍성한 추수감사절 식사는 누구나 즐기는 전통적인 추수감사절 음식이 됐지만 1800년대만 해도 8~10파운드 무게의 칠면조 한 마리 가격은 하루 임금을 지불해야 했을 만큼 희귀한 음식이었다. 솔직히 순례자들이 칠면조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야생 조류'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다. 당시 식민지 개척자 에드워드 윈슬로우의 기록을 보면 첫 번째 추수감사절에 대한 내용에서 식사를 위해 야생 조류를 모았다고 적혀 있다. 야생 조류에 칠면조가 포함됐을 가능성도 있지만 당시 흔한 음식이 아니었던 만큼 오히려 거위나 오리가 더 설득력이 있다. 이밖에 윔파노아그 인디언들이 다섯 마리의 사슴을 데려왔다고 기록이 남아있어 사슴고기도 함께 먹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당시에는 바다가재와 조개를 포함해 해산물이 풍부하고 흔해 식탁에 관련 요리가 올라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외에도 당시 추수한 옥수수와 호박 등 다양한 야채들과 밤, 호두, 크랜베리도 먹었을 것이다. 반면 당시엔 감자나 설탕, 밀가루와 버터는 없었기에 이런 재료가 포함된 빵이나 파이는 먹지 못했다. 장연화 기자미국 추수감사절 추수감사절 연휴 추수감사절 추수감사절 올해 추수감사절